청일전쟁부터 경술국치까지 슬픈 역사정리






8월29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냥 무슨 요일이겠구나 하고 지나가시는 분들도 많으실겁니다. 8월29일은 경술국치 입니다. 이게 무엇인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나마 써보고자 합니다.

먼저 밑 배경을 알아야지 이야기가 더 와닿습니다. 원래 역사는 스토리를 이해하면서 배워야합니다. 학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생략하고 활자로만 배우기에 제 생각에는 학생들의 흥미가 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시대순으로 이해가 되게 풀어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청일전쟁 후 부터 진행하겠습니다.


해외상황

(사진 출처 : 나무위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청과의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이 바로 시모노세키조약 입니다. 일본은 승전국이 되고 청에게 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를 배상금으로 지불 받고, 중국의 영토인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평후섬을 할양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주를 노리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이에 간섭을 합니다. 이게 바로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 삼국은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자신보다 힘이 쎈 나라들이 압박을 하니 어쩔 수 없이 랴오둥반도를 돌려주게 됩니다. 일본은 이때부터 다시 이를 갈기 시작합니다.


약 10년 동안 이를 갈면서 전쟁준비를 하던 일본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2월 8일 일본함대가 뤼순군항을 기습공격을 합니다. 그리고 10일에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전쟁이 장기화가 되자 일본은 지탱할 힘이 약해졌습니다. 가뜩이나 러시아는 주력부대가 하얼빈에 집결을 해서 반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에 더욱 급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1905년 내부에서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마찬가지로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양국은 어쩔 수 없이 강화를 해야했습니다.


(침몰하는 발틱함대. 기록화)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정적인 한방을 승기를 잡은 뒤 미국에게 중재를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리바우항을 떠나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던 발틱함대와의 대마도해전이였습니다. 너무 먼 길을 돌아오느라 전력과 전의가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일본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1905년 5월 27일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일본 연합함대는 24시간 동안 계속된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격파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됩니다. 해전에는 패배했을지 몰라도 육군은 아직 여유로웠던 러시아였기에 포츠머스강화회의에서 러시아는 패전을 인정하려하지 않았습니다.


(포츠머스 조약)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1. 한국에서의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상 우월권을 러시아가 인정하고 이에 방해하지 않는다.

2. 러일 약국 군의 만주 철수

3. 관동주, 동청 철도 남만지선의 일본 양도

4. 남사할린을 일본에 양도

5. 연해주 방면의 일본 어업권 승인






국내상황

이제 국내상황을 알아봐야 합니다. 러일전쟁 중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게 됩니다.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하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 시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이 러일전쟁에서의 위치가 유리해지자 한국을 확실하게 식민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국제사회를 주시하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열강의 묵인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느끼고, 일본은 열강의 승인을 받는데 온 힘을 쏟습니다.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하였고, 8월12일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 러일전쟁 승리 후 포츠머스강화조약까지 결국 완벽히 모든 일을 해냈습니다.


11월 9일 이토는 고종을 만나 일본왕의 친서를 봉정하며 위협을 가했고, 이어 15일에 다시 고종을 만나 한일협약안을 들이밉니다. 조정에서는 반대를 합니다. 일본은 17일 궁궐 주의와 시내에서 시위를하고,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왔다갔다하며 압박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공포감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합니다.

이토는 고종을 세 번이나 만나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또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 일치가 되지않자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이토가 들어오게 됩니다. 다시 회의를 열게되고 대신 한 사람 마다 조약체결에 대해 찬부를 물었습니다. 이때 참석한 대신은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 국가보훈처)


한규설과 민영기는 적극적으로 조약체결에 반대를 하였고,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태도로 반대를 하다가 권중현은 추후에 찬성을 합니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이기지 못하고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의를 밝혔습니다. 이때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로 뛰어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던 도중 쓰러집니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함께 회의를 다시 열고 조약내용을 약간 수정을 한 뒤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약 승인을 받아냅니다. 이때 찬성한 대신들은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이들이 바로 을사오적입니다.


(을사조약 전문)


(을사조약 후 기념촬영)


을사조약 체결은 일제의 강압 속에서 박제순과 하야시 사이에서 하게 됩니다.


을사조약 내용은 이러합니다.




(신돌석장군 전투 기록화)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습니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을 합니다. 외교 뿐 아니라 내정까지도 장악해버립니다. 민중들은 각자의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를 하였고 국민들은 일어나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오적을 비난했습니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4일 뒤 황실고문인 헐버트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라고 통보를 하며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에 이 사실이 알려지며 런덤타임즈는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에 대해 상세히 보도를 했습니다. 유생과 전직관리들은 상소투쟁을 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몇몇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맞섰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환 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감한 투쟁을 펼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큰택, 권중현을 암살하려는 개인적인 테러도 일어났습니다.


(위 사진은 경술국치 직후 사진이 아닙니다. 1915년 사진 입니다.)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바로 경술국치로 넘어가겠습니다.

경술국치란 경술년에 일어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을 말합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에게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을 합니다. 일제는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한일합방, 한일합병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엄연한 국권피탈 입니다.


(이완용)


을사오적 중에서 아마 가장 많이 입에 오르는 사람은 이완용일 겁니다. 오적 중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완용은 천하의 나쁜놈이란 것을 우리는 확실히 기억합니다. 근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모르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과 일제 사이에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는데 이때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킨 사람이 바로 이완용 입니다. 장기를 다 찢어 죽일놈 입니다. 이로인하여 8월29일 조약이 공포가 되고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으로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경술국치 이후로 일제에 편입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토 사살 저격 직 후 안중근의사.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참고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은 이토가 아닙니다. 이토는 1909년 6월에 통감직을 사임했으며 그 해 10월26일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살 당합니다. 이토는 이미 지옥에서 살고있기에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누가 체결했는가 하면 바로 데라우치 입니다.


(데라우치)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통감으로 부임하며 그 해 8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합니다.

데라우치가 병합조약안을 수교하자 이완용은 그에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문제와 황실 존칭 문제에 대해, 현 황제를 병합 이후 이태공이라 부르자는 일본 측 제안에 대해, 이완용은 이왕 전하라는 명칭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이것은 조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로서 체면을 유지하며 황실 및 원로들의 반발을 완화시키려는 쇼에 불과 했습니다. 일본 측도 원활한 교섭을 위해 이완용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으므로 황실 칭호 부분만은 양보했습니다.



(위 태극기 사진의 저작권은 오직 저에게 있습니다. prejuicio.tistory.com 무단으로 가져갈 시 불이익이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경술국치 전이나 후나 이런 슬픈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직접 경험을 해보지는 못했지만 역사공부를하며 이런 사실에 대해 알게됩니다. 정말 슬프고 분한 역사 입니다. 이런 역사는 반복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역사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쓰레기 같이 역사를 왜곡하는 사이트와 영화는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 쓰레기들이 있기에 역사는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저 시대에 살았다면 을사오적이 안되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학교에서는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고 아이들이 있는 어른들도 아이에게 바른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경술국치는 8월29일 입니다. 꼭 태극기를 조기게양을 하고 아픈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