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가 레닌의 재미있는 실화




영국식 의회주의를 도입하자는 사람들은 영국 의회가 자기나라 왕의 목을 잘랐던 것부터 기억해야 한다.

- 레닌 -


본명:Влади́мир Ильи́ч Улья́нов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필명:레닌

1870.4.22 ~ 1924.1.21



레닌은 원래 힘이 장사였다. 학창시절에는 실제로 성적도 최상위권이었고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만약에 자신이 책을 읽을 때 시비를 거는 학생이 있으면 당연히 폭력을 시전. 덕분에 레닌이 일단 교실에서 책을 꺼내면 모두가 무조건 조용히 있어야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간단한 강도는 그냥 제압해 때려 눕힐 수 있을 정도였고, 토론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질 때 자기 측의 인원 중 하나가 폭력을 쓰려고 하자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논쟁의 자리에서 폭력을 쓰는 자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한 운동을 좋아하여 볼가 강을 따라 카누 타는 것는 것을 어려서부터 즐겼을 뿐 아니라 스키와 등산도 좋아하여 알프스를 등반하는 것도 즐겼다. 여기서 따라 온 일행들이 퍼지면 "벌써 퍼지는 건가?"라고 핀잔을 준 뒤 그래도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갔다. 국가원수가 된 이후에도 차를 타기보단 크레믈린 주위를 자주 걸어다녔으므로 강도를 만났던 적도 있고 저격 미수사건도 이 도중 일어났다. 또 2월 혁명 이후 독일에서 러시아로 향할 때 기차 안에서 수상해 보이는 인물을 발견하자, 다짜고짜 그 사람을 기차의 플랫폼으로 던져버렸다.




위 사진은 1908년 망명 생활 중인 레닌이 보그다노프와 함께 체스를 두는 모습이다. 오른쪽에 승기를 제대로 잡았는지 입을 벌리며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레닌이다. 레닌은 만성적인 위장 질환을 앓았다. 광천수를 마시도록 처방하고 각종 검사를 해봐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는데, 결국 원인은 체스였다. 레닌은 체스를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체스 도중 좋은 수가 떠오르면 숙이고 있던 상체를 갑자기 일으키며 힘을 주는 버릇이 위장에 무리를 준다는 것을 밝힌 것. 사실 알고 보면 종합병원 수준인데, 특히 신경쇠약은 항상 달고 다녔으며 불면증으로 고생하여 심하면 며칠이나 잠을 못 자기도 했다. 그의 말년 뇌출혈이나 기타 사소한 질병들은 그의 아버지 쪽 가족력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레닌은 학창 시절에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어머니로부터 '담배는 건강에 해롭다.'라고 충고를 들었을 때는 상큼하게 씹었다. 그러나 나중에 어머니가 다른 방법으로 '너에게는 네 담뱃값으로 가족의 재산을 소모할 권리가 없다.'라고 하자 그 즉시 금연했다.



동상이나 초상화 등에서 코트 등의 옷깃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는 간지 때문이 아니라 본래 겁을 먹었거나 긴장했을 때 하던 버릇이다. 이 덕에 옷깃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옷을 한번 사면 낡아 빠질 때까지 입었기 때문에 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마치 나폴레옹이 배가 아파서 하던 행동이 간지의 상징이 된 것과 비슷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대학교에서 각광받던 학과는 과학, 기술 혹은 의학과였다. 실제로도 누나와 형 모두 그렇게 진학했고 마찬가지 성적이 뛰어났던 레닌도 그럴 것이라고 보였지만, 레닌은 뜬금없이 당시 비인기 학문인 법학을 선택한다. 이는 레닌의 형제나 어머니도 말렸었지만, 그의 고집을 누가 꺾겠는가? 결국 레닌은 법대에 진학했다.

레닌은 학창 시절에 최우수 학생이었으므로 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교육 방식은 미칠듯한 암기와 물어봐서 답을 못하면 패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레닌의 집에는 밤이면 밤마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강요하여 "울어라."라고 명령한 다음 반응이 없으면 패서 울게 만든 다음 "너는 네 명령에 복종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동생들을 그만 좀 때리라고 말렸을 정도.


소련 시절에 나온 레닌에 관련된 책을 보면, 아버지의 사망 이후 그가 기지를 발휘해 가족들을 부양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레닌은 그 후에도 어머니 밑에서 값비싼 여러가지 부대비용을 요구하는 벅찬 존재였다.


그는 육체노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단지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거나 도서관에서 아예 안 오거나 했을 뿐이다. 이 덕에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영지를 팔기도 하고, 레닌의 요구에 따라 이사를 다녔으며, 집에 세를 내거나 하는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주었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 근데 아쉽게도 레닌의 부모님은 레닌이 권좌에 앉기 몇달 전 사망했다. 조금만 더 살았다면 아들이 차르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텐데..


레닌은 책을 사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쪼들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독촉해서라도 돈을 구해 책을 샀을 정도로 책벌레다. 책의 요약 및 정리하는 능력이 일반인과는 넘사벽 수준이었으므로, 토론에 들어가면 논쟁에서 유리하기 위해 관련 서적을 많게는 4백 권씩 읽었다. 또한 5천 단어로 된 문서 하나 쓰는 데는 4시간이면 충분했으므로, 레닌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연설가이자 세계구급 논객이었다.




다혈질로 유명하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역에서 실제 객차의 자리수보다 표를 많이 발권하는 오류로 승객들과 승무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레닌은 분명히 올바른 좌석 표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열차가 지연되기 시작하자 승강장으로 박차고 나가 승무원을 붙잡고 입배틀을 시전, 결국 모두 타고 갈 수 있게 한 경우가 있다. 설전이 붙으면 상대가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논쟁했으며 이 시간이 몇 시간씩 가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스탈린은 말년에 말도 잘 못하는 레닌을 상대로 논쟁했을 때도 백이면 백 발렸다. 심지어 볼셰비키 최강의 이론가이자 꿀리지 않는 아가리 파이터인 니콜라이 부하린도 망명시절에 몇번을 발라먹었다.



소비에트의 국가원수가 된 이후, 관용차로 당원들이 롤스로이스 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에 관심없던 레닌은 차가운 반응이었고, 한번 타 보았을 때 러시아의 눈보라에 바퀴가 빠져 운전기사와 함께 이것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자 돌아와서 이걸 갖다 버리라고 말했다.




특히 다른 곳은 어질러지든 더럽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의 집무실에서만큼은 업무를 볼 때 연필을 반드시 뾰족하게 깎아서 길이를 맞추어 일렬로 배치해야 했고, 자리에 앉을 때 책상을 반드시 걸레로 닦은 뒤에야 업무를 보았다. 뇌출혈로 정권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크레믈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물건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러 올 정도. 이는 소음에 관련한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소리를 내면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레닌의 아내인 크룹스카야는 그가 서재에 들어가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야만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집무실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누가 담배를 피우면 밖의 날씨가 어떻든 간에 창문을 열어버렸다. 특히 스탈린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자, "이 아시아놈 같이 생긴 작자를 보게! 할 줄 아는 건 저렇게 않아서 담배 빠는 것 밖에 없잖아!"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루지야인인지라 아시아인이라는 말에 컴플렉스가 있던 스탈린은 빡쳐서 파이프를 던졌다는 후문이 있다.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서 반대파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갈라졌지만 한때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마르토프는 10월 혁명 후 레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냐는 질문에 "온종일 혁명만 생각하고, 혁명에 대한 글만 쓰고, 혁명에 관한 글만 읽는 사람이 어찌 집권할 수 없었겠소."라고 되물었다. 레닌은 한때 혁명 동지였으나 노선 차이로 갈라진 멘셰비키 인사들에 대해 매우 관대했으며, 옛동지 마르토프도 해외 망명을 허가해줬다.







[출처] 러시아혁명가 레닌의 재밋는실화. (『C.F.H』역사의 진실을 찾는 카페(세계사 & 국사 전문 카페)) |작성자 Che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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